심보선

풀 수 없는 매듭의 공동체

심보선 (시인. 사회학자)

(김)범준의《모산 모산 모산》은 내게 시기심과 애틋함을 동시에 자아낸다. 그의 작품세계를 보면 내가 해내지 못한 것을 그가 해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모산은 작가의 어머니의 실제 고향이자, 작가가 창조한 어머니의 산이고, 그 어떤 산도 아닌 아무 산이다. “떠나온 장소”와 “상상의 장소”와 “아무 장소”가 결합되어 만들어낸 표상이《모산 모산 모산》이다. 그 표상 속에서 (김)범준은 아들이면서 아들이 아닌 것 같고 그의 어머니는 어머니이면서 어머니가 아닌 것 같다. 그가 성취한 것은 바로 내가 원했으나 이루지 못한 모자 관계였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낸 시집들 모두를 열독하셨다. 시집을 낸 직후 어머니 방에 들어가면 늘 내 시집이 놓여 있곤 했다. 그러나 내가 물어보기 전까지 어머니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감상을 물어보면 어머니는 늘 “내가 뭘 알겠니”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한 번 더 캐 물으면 그제야 “지난번보다 이번 게 더 좋아”라고 대답하셨다. “시”에 대한 먼 거리감과 아들에 대한 가까운 거리감이 겹쳐진 “다초점”의 대답이라고나 할까. 
한 번은 어머니에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무』를 함께 읽자고제안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망설였으나 뜨악해 마지못해 아들 의 청에 응했다. 나는 어떤 글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나는 이 프로젝트(?)가 무척 기대된다. 물론 어머니가 “에이, 안 해! 재미없어! 어려워!”라고 중도 포기를 선언하실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최근에 이진경 선배와 『존재와 시간』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책에는 소위 ‘세인(世人)’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선배는 그것을 “They say”, 즉 그들이 말하는 식으로 사는 인간형,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생각하며 사는 인간형이라고 말했다. 나는 무엇보다 어머니와 세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나 또한 어머니에게 나의 실존적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아들과 어머니 사이의 세속적 공감대가 아니라 사유하는 두 존재 사이의 공감대가 출현할 수 있다. 정말로 기대되지 않는가!”

그러나 문제는 정작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큰 기대를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프로젝트를 추진하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도 그 프로젝트를 언급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너무 어려운 텍스트여서일까? 아니면 의지의 부족 때문이었을까? 

(김)범준과 그의 어머니는 협업을 통해 작품을 탄생시켰다. (김)범준은 고객이 원하는 그림을 맞춤형으로 제작하듯 어머니의요청사항을 수용하여 그림을 완성하여 거실에 걸었다. 현대 미술 작가가 거실 장식용 그림을 그리다니! 그는 효자인가? 혹은 효자를 가장하여 가족주의 비판을 시도한 것인가? 그런데 그의 작업이 펼쳐놓은 사태는 역할이냐 아니면 역할극이냐 식의 간단한 도식으로 분석하기 어려운 듯하다.
현대 미술 작가들이 전근대의 작가들과 다른 사회적 위상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주문 제작을 하느냐 마느냐에 있다. 백남준은 말년에 회화 작품들을 다량 제작해서 판매했는데 이유인즉슨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백남준은 백남준다웠다. 그는 신문지 위에 어린 아이가 낙서하듯 그림을 그렸다. 사려면 사고 말려면 말라는 식이었다. 

(김)범준 어머니의 요청 사항은 확실히 현대 미술의 문법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김)범준의 어머니는 미학적 혁신보다는 편안함과 익숙함을 선호했다. (김)범준이 백남준이었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요청이었다. 백남준이라면 이렇게 말했으리라. “나는 주문제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더구나 그런 취향은 나와 맞지 않습니다!”
(김)범준이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일견 커뮤니티 아트의 그것과 닮아 있다. 공적 지원금을 받아 지역 주민들과의 협업을 통해 작업을 제작하는 현대 미술 작가들은 그 과정의 결과물들을 개인 작업과 연계시키기도 한다. (김)범준의 경우는 대상 커뮤니티가 가족이며, 참여 주민들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작가 자신이 되는 셈이다. 예컨대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예술하기1·2>의 경우 “예술교육” 및 “주민참여” 프로그램을 닮아 있다. 그러한 프로그램의 결과물들을 개인 전시에 재활용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사실 이 유사성은 지극히 표면적이다. 왜냐하면 커뮤니티 아트를 정당화하는 근본적인 이념은 “예술의 공공성”이기 때문이다. (김)범준의 가족과의 협업 프로젝트는 형식적으로는 커뮤니티 아트이지만 그 형식이 적용되는 대상은 유일무이한 사적 공동체이기에 예술의 공공성이라는 개념이 온전히 관철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커뮤니티 아트를 향한 비판, 즉 “공공성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주민을 작가의 작업에 동원하고 도구화한다”는 비판은 (김)범준의 작업에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김)범준은 계약 관계(공공예술)나 정치적 책임(사회적 예술)을 통해 가족과 협업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공공예술과 사회적 예술에 작가와 공동체 구성원이 맺는 관계는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로 불린다. 인게이지먼트는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참여”로 번역될 것이고 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연루”로 번역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선택에 의한 관계맺기이고 그 관계맺기가 실패할 경우 구성원들은 다른 종류의 대안적 관계를 모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예술과 사회적 예술에 참여하는 작가들조차 “주문제작”의 압력을 피할 수 있다. 마치 백남준이 거대한 예술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원하는 다른 구매자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주문제작을 거부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처럼, 커뮤니티 아티스트들 또한 차선의 프로젝트 기회(다른 공동체, 다른 프로그램)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자신의 자율성을 고수할 수 있다. 이 자율성이 극단화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공공성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주민을 작가의 작업에 동원하고 도구화한다”는 비판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학자 게오르그 지멜이라면 커뮤니티 아트와 (김)범준의 “패밀리 아트(?)”를 “삼자관계(triad)”와 “이자관계(dyad)”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것이다. 지멜에 따르면 삼자관계는 사회적 관계의 축약본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협력은 선택(두 사람)과 배제(한 사람)를 가능하게 하며 이를 통해 전략의 수립, 실행, 변경, 재수립, 재실행이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패를 숨기고 수를 따지는 전술 또한 가능해진다. 커뮤니티 아트는 삼자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커뮤니티 아트에 대한 비판은 대개 삼자관계의 부정적 속성-불투명성, 동기의 은폐, 대상의 대체 가능성 등등-을 향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자관계는 어떠한가? 이자관계는 정보의 투명성과 완전한 신뢰가 전제되어야만 맺어질 수 있다. 불투명과 불신은 관계의 파괴로 이어지며 대안적 관계가 부재하기에 파괴된 이자관계에서 떨어져 나온 참여자들은 고립된 개인으로 남는다. 가족 관계야말로 대표적인 이자관계라고 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은 둘 중 한 편이 사라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대체 부모와 대체 자식은 불가능하다. 가존 관계의 파괴는 사별 아니면 의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은 서먹서먹하고 불편해도, 갈등이 생겨도 가끔씩은 연락을 취한다. 의절한 채 사별하는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다.
삼자관계의 관계 공식이 인게이지먼트라면 이자관계의 관계 공식은 바인딩(binding)이다. 바인딩은 굳이 번역하자면 “풀 수없는 매듭”일 것이다. 이자관계의 특징은 그 안에 존재하는 이상 그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이다. 벗어남은 관계의 소멸이기 때문이다. 풀 수 없는 매듭은 그대로 두거나 혹은 잘라내야 한 다. 다른 선택은 없다. 

여기서 핵심은 (김)범준의 패밀리 아트가 바로 이 이자관계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야말로 그의 패밀리 아트를 삼자관계에서 작동하는 커뮤니티 아트와 구별하는 결정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김)범준이 자신의 어머니와 작업을 할 때, 의절의 위험을 감수하고 그렇게 했을 리는 없다. 이자관계에서 이루어진 (김)범준 작업의 핵심적 특징이란 다음과 같다. (김)범준은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어머니는 (김)범준의 그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김)범준과 어머니는 작업 속에서 “풀 수 없는 매듭”으로 묶여 있다. 
내가 “하이데거 프로젝트”를 나의 어머니와 수행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프로젝트의 어려움이나 의지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 “풀 수 없는 매듭”의 무게,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 한다는, 그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범준은 어머니와 끝까지 갔다. 결과물은 무엇인가? 미디어, 영상, 프린트 같은 도구와 재료에 익숙했던 (김)범준이 회화라는 새로운 작업방식을 취한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번 전시에서 회화는 순전히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자관계적 의무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어머니가 원하는 작품을 제작한다고 해놓고 어떻게 설치와 미디어 아트를 만들 수 있겠는가? 이는 어머니 편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익 숙한 구상화와는 거리가 먼, 사실적 디테일이 결여된 거의 추상에 가까운 이상한 회화를 어머니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김)범준과 어머니는 회화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회화가 (김)범준과 어머니를 선택한 것이다. (김)범준과 어머니와의 이자관계에서 회화는 필연이었다.

(김)범준의 《모산 모산 모산》은 어머니와의 이자관계에서 제작된 “모산”을 수많은 모산으로 증식시킨 결과물이다. 전시장 한 가운데에는 <정상>이라는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입체적 풍경으로, 다수의 “모산들”로 이루어진 경관으로 바라보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요컨대 (김)범준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물리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압도적인 작품은 걸개그림으로 제작한 <모산>이다. 너비 3미터, 길이 23미터라는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걸개그림은 판매되어 소유될 수 없는 형태의 작품이다. 걸개그림은 궁극적으로 “공표”를 목표로 하며, 그런 이유로 프로퍼갠더나 광고에 흔히 사용되곤 한다. 이자관계, 즉 비사회적이고 비정치적이고 비상업적인 관계의 산물이 공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는 이를 한 개인의 어머니가 공동체의 어머니로 확장되었다는 식으로 봐야 할까? 그러나 (김)범준의 작업은 그 같은 모성 이데올로기의 확장 논리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김)범준에게 모성(母性)은 다성(多性)이며, 실명과 가명과 익명을 동시에 장착한 표상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고 차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이 수용의 결과는 타협이 아니다. 아들은 아들이면서 아들이 아니고 어머니는 어머니이면서 어머니가 아니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이자 아무나가 된다. (김)범준의 작업 덕분에 우리는 “풀 수 없는 매듭”으로 엮인 평등한 공동체의 형상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