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

모산모산모산-아무개, 어머니, 그 동네의 산

김태진 (작가. 국민대 교수)

 전통적인 미술의 향유 방식과 현대미술이 고안해 낸 어법들이 뒤섞여 있는 이 전시는 어딘가 모르게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아무개, 어떤’이란 개념에 집중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그의 주제의식이 예술을 포함한 모든 현실 세계 안에 통용되는 이미지들을 비롯해 정형화된 의식들 전반에 널리 분포해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본다. 대지의 어머니, 모성으로서의 대지, 흙 이런 도상들은 누구나 나눠 가지는 마음의 공통 코드이다. 먹을 이용해 천에 스며들도록 해서 그려 놓은 첩첩의 산 풍경화가 바로 옆 어머니의 형상을 지평선에 걸쳐진 산등성이처럼 표현한 그림과 나란히 놓여 있다. 그것들은 서로를 참조하며 닮아있고 그래서 더욱 쉽고 익숙하게 접근해도 될 것 같이 편안한 모습으로 전시장 이곳저곳에 있다.
 먹의 농담을 달리함으로써 포개져 있는 산등성이 앞뒤의 거리를 표현하는 대기의 흐림 효과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회화의 재현 기법이다. 르네상스의 회화 기법인 스푸마토도 이러한 원근의 시각 체험을 담아내고자 한 경우이다. 예술의 너무나도 오래된 기초가 되는 시각의 형식이라 굳이 언급할 필요도 못 느낄지경이다. 그러나 이와 비슷하게 익숙한 기호를 사용하면서도 낯섦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작업도 눈에 띈다. 문규철과 협업한 디지털 그물망의 요동치는 화면은 삼차원 공간을 그리드로 시각화해 데이터의 기호로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각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드의 좌표(또는 대지의) 불안정성을 불규칙한 움직임을 통해 극대화함으로써 신체적이거나 의식적인 모든 측면에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대지에 절대적으로 종속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으로 주어져 있어 당연시되는 그 모든 의식의 총체적 조건에 대한 뒤틀기를 시도한다. 즉 보편적 의식의 견고한 지지구조를 허물어뜨리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가 캔버스와 걸개 등 회화의 전통적 틀이 갖는 일반적 형식을 순순히 따르는 것처럼 구는 이유도 기존의 모든 인식의 틀, 조건 등을 대상으로 삼아 그에 대해 어떠한 발언을 하려 한다는 의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여겨진다.

 캔버스, 걸개 등의 익숙한 시각적 형식을 더욱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첩첩의 산, 어머니와 자식의 형상을 한 풍경화의 이미지이다. 그가 어머니의 고향을 그려서 선물하겠다는 임무를 스스로 부여하고 그 과정을 기록해서 티브이 오락 프로그램 형식의 영상으로 제작한 것 또한 그 의중에는 익숙함, 평범함, 아무렇지도 않음 등의 정서적 효과가 필요했을 어떤 이유가 있었다고 짐작하게 된다. <완벽한 그림>(2019)은 어머니의 고향을 사생하러 가서 겪는 일들을 보여준다. 아무런 경계심 없이 즐기면서 시청하게 되는 이 비디오 영상은 티브이를 틀었을 때 늘 보게 되는 자막과 효과음으로 가득한 가족 오락물의 진행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러한 편안함과 익숙함을 모방하려는 충동은 그것을 예술의 창작 원리로 삼고자 하려는 의도보다는 오히려 그 모든 기성의 평범한 것들 사이에서 예술의 설 자리를 묻는 와중에 선택된 하나의 전략으로 읽힌다. 영상의 내용은 흔한 이야기 전개의 구조를 따른다. 출연자가 어떤 목표와 동기를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사건이 흘러간다. 시청자에게 출연자가 쫓아가야 할 목표를 중심에 놓고 이 일련의 사건 전개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 전개의 유형이다. 그렇다면 그가 여기서 이야기의 구심점으로 던져 놓은 완벽한 그림이란 무엇인가. 왜 이 시점에서 그것이 물음의 대상이 되는지를 따져보자. 작가 자신에게 어머니의 고향은 향수의 대상인 모성의 이미지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것이 기원하고 있는 이상향의 풍경을 환상적 형태로 극대화한 장소로 작용한다. 물론 그 지명은 실재하는 어머니의 고향임이 분명하지만, 작가에게는 상상의 공간이자 다소 기묘하게 여겨지는 장소이거나 아무 상관 없는 농촌 마을 어디라고 해도 별로 다를 것 없이 느낄 정도로 평범한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어머니께 선물로 드리기 위해 그것을 그리는 일이 작가에게 임무로 주어지는 것은 예술에 대한 사랑과 염원을 포함한 사랑 일반에 대해 직접 언급하기 위해 작가가 이 프로젝트 안에서 일부러 마련해 놓은 방편이면서, 예술에 대해 문외한인 외부인(대중)의 관점에서 예술에 대해 부여해 볼 수 있는 그 모든 촌스럽고 낡은 기대감의 종합선물세트 같기도 하다.

 현실의 기본 구도 안에서 예술이 작동하는 방식을 되묻는 이런 전략은 그의 이전 작업들에서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예술하기>(2011)는 국가, 가족 등의 사회 안에서 남아(남자아이, 또는 사내대장부)에게 부여된 기대감 같은 형태로 고착된 기성 사고방식을 대면해서 마치 그 견고한 사회적 무지의 전통을 계몽하려는 듯한 다소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을 보여준다. 장남이 가족들 앞에서 예술을 설명한다. 대한민국 장남에게는 자기 일과 존재가치를 설명해야 할 권리와 책무가 주어져 있다. <아버지와 친해지기 위한 방법>(2017)에서는 느닷없이 아버지의 사랑이 주제로 떠오른다. 어린 아들과 이불 깔아 놓고 놀아주던 아버지의 과거 역할을 서른 넘어 다 큰 아들이 다시금 수행하도록 요구한 이런 상황도 예술이 어떠한 동기에 의해 만들어지고 작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맞닿아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그의 개인적 기억으로 회상하는 것이지만 그가 젊은 예술가로 직면하고 있는 이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으며 그만의 현실인 것도 아니다. 가족의 애정과 지원 없이 불가능할지도 모를 우리 사회의 젊은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의 한 경우를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남다를 것 없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일반적 상황들에 대해 비평적으로 다루는 태도의 근저에는 어쩐지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마음 또한 자리해 있는 듯하다. (그의 아버지의 경우 특히) 결혼하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되거나 아이를 낳아 잘 기르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려 애써온 인생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겠는가. 이 세상을 구성해 내는 모든 생산적 활동의 가장 기초를 이루는 가족에 대한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랑. 예술은 그것을 초월해서 별세계의 무엇인가로 존재할 수 있는가를 역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전시의 제목에서 반복되어 강조된 ‘산’이라는 단어는 세 개의각기 다른 색의 삼각형으로 기호화되어 있다. 삼위일체와 같은 안정감을 주는 완성체의 도상은 국가가 지향해야 하는 사회적 이상향을 담은 조화로운 가치의 조합을 떠올리게 한다. 산과 같은 아버지가 떠받치는 사회는 안정되어 있다는 일반적인 믿음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근면, 자조, 협동을 강조한 새마을 운동은 세 가지 실천 강령의 조화로운 작동원리를 강조한다. 민방위 훈련은 지역민 스스로 그들의 마을을 수호해내야 한다는 일념을 강조한다. 반복된 훈련을 통해 애향심을 키우고 밖으로부터의 위협에 언제든 일치단결해서 대처하도록 우리를 조형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발자취를 남기는 이러한 상징들은 국민이자 시민인 이 사회 구성원들의 뇌리에 남아서 주어진 책무를 수행토록 한다. 강제적이지만 외면적으로는 자발적이며 사회의 기본 단위에 이미 뿌리내려 있고 세세하게 사회 구성원의 행동 양식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저변 위에서 펼쳐지는 일상의 일화들을 우리는 매일 티브이에서 소비한다. 심각함을 걷어내는 농담의 시각적 체험, 가족 오락 방송의 자막과 그래픽의 전형적이고 평범한 가벼움은 시청자의 의식을 현실의 총체적 층위로 즉시 소환하는 능력이 있다. 티브이 시청 시간은 심심풀이의 시간에 불과한 것 같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현실에 대한 강력하고 절대적인 감각을 형성하는 중요한 틀로 작용한다. 이 모든 착상과 실천의 근저에는 ‘미메시스(mimesis)’가 있는 것 같다. 세 개의 모산 그 어디에도 베낀다는 뜻의 ‘모(摹)’는 없는데 이 개념을 작업에 적용할 경우 재현이라는 해묵은 주제를 건드리는 것 같았는지 작가는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널리 보면 이 전시의 요소마다 이러한 모방에 관한 관심이 읽힌다. 티브이 방송의 흔하디흔한 유행을 따르는 진행 형식과 현대미술의 여러 유형을 포함해서 모든 사회적 형식들이 얽혀 작동하고 있는 양태를 적당한 수위에서 모방하여 섞어 놓아 그것들 서로가 교묘하게 각자에 기대어 현실의 모순적 층위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이 모든 삶의 순간순간은 무엇을 향해 있는가? 그것의 목표하는 바는 과연 실체를 갖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삶의 방식들 안에서 그저 답습되는 태도 안에서만 에둘러 언급되곤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