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선

일상과 예술에 대한 비판적 접점

성원선 (미술평론)

작가들은 개인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자기정체성의 탐구와 예술의식을 획득하고, 기성의 사물과 이야기를 상상과 변주를 통해서 새로운 예술을 위한 표현을 실험한다. 

창작물(작품)로 뭉뚱그려 통합된 미의 층위들은 형식과 내용에 따라 시공간의 맥락 속에서 동시대인들과의 소통의 결은 각각 다르게 가로지른다. 동시대에서 예술생산은 창작자의 영역을 벗어나 예술의 감상자인 대중에 의해서 복제, 재생산, 패러디되면서 작가와 관객, 창작자와 대중의 간극은 좁아지게 되었다. 이미 오늘날에는 대중과 관객들은 예술의 경험, 수용은 어떤 방식으로도 통제할 도리가 없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작가와 관객, 그들의 예술작품에 대한 인식들은 천차만별이지만, 예술의 장속에서 그들 간의 미학적인 의견의 대립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를 위한 예술’과 ‘모두의 예술’은 사회학적 미학의 선언이다. 예술에서 취향의 다양성, 그리고 각 개인의 미의식의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정당한 인간의 욕구이자, 자연스러움이다. 그리고 무엇이, 어떤 것이 예술인지에 대한 구분도 오늘날에는 사라졌다. 

전통적인 미술사에서 새로운 예술에 대한 욕망들이 창작자의 미적 취향판단에 종속시키는 초월적인 주관론들에 있었다면, ‘모두를 위한 예술’과 ‘모두의 예술’의 주장들은 경험적 주관에 그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감각 공동체로 공감되는 예술취향과 미학적 인식의 연대는 무엇을 통해서 이뤄지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의 작가와 미학자들에게 중요한 비판적 성찰이 일어나야하는 지점이다.

(김)범준은 감각적인 소통을 이루는 작품의 근원을 찾아가는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한다. 작가로서 자신, 가족이라는 관계라는 것을 미학의 담론을 생성하는 관계로 설정하고, 각자가 가진 혹은 기성의 미적 판단들을 인용하고 역치한다. 그와 더불어 관객들은 그가 만든 작품의 근원과는 더욱더 먼 곳으로 미학적 경험을 하게 된다. 

예술경험과 향유가 영양실조 상태인 관객들은 선입견 속에 가두어 작품들을 판단하고, 시야로부터 스쳐지나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관객들은 자기 자신의 작은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작품의 요소들 간의 관계구도를 알아채는 순간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질문의 총체를 한 순간에 이해하게 된다. 

관객은 자신들의 경험들이 예술이 만들어내는 감각의 공동체에 대한 어떤 커다란 이해관계이자, 순환적이고, 복합적인 층위에서의 지식과 감각적 향유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예술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대상이자, 사물로부터 벗어나 정신과 감각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를 열게 한다. 

그것은 (김)범준 작가의 작업으로 드러난 관계 –자신과 아버지, 자신과 어머니, 자신과 고향, 자신과 예술 간의 관계– 들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경험, 그것이 작가로부터 이든 관객으로부터 이든 서로 교차되고 투시되는 것들이다.

전시 《첩첩산중(疊疊山中)》에서 작가는 어머니의 고향에 있는 야산인 ‘모산’을 새롭게 경험하고 다중적인 복선이 깔린 명칭으로 사용한다. 

작가는 작품의 명제로 사용함에 있어서, ‘모산 모산 모산’ 이라고 연거푸 쓴다. 그것은 예술에 대한 수행, 실천적 태도를 설정하고, 그것으로부터 풍경의 사생을 ‘모산’을 통해 새롭게 그려내는 것을 말하고, 어머니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풍경인 ‘모산’을 그려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전시를 통해서는 실제와는 다른 ‘모산’에 대한 서로 다른 미적 경험을 통해 탄생된 사물로의 예술작품들을 보인다. 

실제의 존재, 기억의 존재, 상상의 존재로의 ‘모산’은 언어적으로는 어머니의 산, 근원적 본향의 산, 모든 산과 같은 의미를 유추하게 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기억이자, 작가가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을 관통하는 장소에 대한 인상(印象)이다.

관찰은 대상에 대한 가장 최초의 경험이다. 사물과 환경에 대한 무관심을 뚫고 시작하는 가장 근원적인 예술경험이다. (김)범준 작가의 고향집 거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은 작가의 어머니의 취향이기보다는 그 그림을 그린 작가와의 인연에 의해서 구매한 그림이라고 한다. 마치 그 집의 가구나 벽지처럼 더 이상 예술로 이야기를 생성하지 못하는 그 그림을 작가는 ‘풍경’그림이라는 대중적 취향의 클리셰를 탈피하고, 사생을 통한 풍경그림으로 어머니를 위한, 그리고 모두를 위한 완벽한 그림을 그려드리고자 한다. 

(김)범준 작가의 창작, 예술창작의 방법으로 ‘사생’의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들은 비디오작업인 <완벽한 그림>(단채널 영상, 00:13:58, 2019)에 담겨있다. 모자간의 대화는 곧 화가와 관객과의 대화이고, 창작자와 컬렉터간의 대화일 수 있다. 그 비디오영상은 마치 TV용 리얼 다큐 프로그램처럼 포스트 프로덕션(post production) -녹음 및 녹화, 사진 촬영, 영화, 비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 디지털 아트의 제작 과정 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서, 실제 촬영이 모두 끝난 뒤에 이루어지는 생산 작업을 통틀어 말하는 일반 용어이다.-
의 과정들을 거쳐 제작되었다. 

‘모산’을 그려내는 방식은 작가가 설정한 관찰, 경험, 실천, 창작과 조형방법을 통해서 재구성되고, 장소 경험으로 풍경, 기억으로부터의 풍경, 예술의 대상으로, 풍경으로 서로 다르게 관찰되었다. 그러한 관찰의 태도와 지점을 상상을 위해 비유해보자면, 태양계의 행성이 서로가 순서가 뒤바뀌어서 그 궤도를 선회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행성은 분명 같은 행성들이지만, 서로 그 궤도와 순서를 달리한다면, 예를 들면 지구가 있어야 하는 위치에 목성의 크기의 행성이 온다면, 목성이 지구로 불릴 수도 있거나, 아니면 지구환경의 풍경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미적 사유와 창작의 변주들 사이에 (김)범준 작가는 작품에 쓰이는 재료와 방법들마저도 다르게 선택하였다. 평면, 입체, 레디메이드, 비디오 등 서로 다른 표현방식들은 ‘모산’에 대한 다른 사색=사생의 방법들을 추리하게 한다.

예술이 존재하는 방식, 그것의 형, 색, 재료, 구성, 방법에 따라 미적 표현의 창출은 수백, 수천가지 방법으로 다르게 된다. 작품의 독창성, 서로의 유별성은 예술의 창작 과정의 다름은 미적인 것의 차이로 드러나는가? 작품의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미적가치는 과연 누가 결정하는가? 하는 질문은 리얼 다큐 형식으로 제작된 비디오 작업 <완벽한 그림>을 통해서 아이러니하게도 미적 취향의 문제와 맞닿게 된다. (김)범준 작가의 어머니는 이전의 그림이 걸렸던 곳에 아들이자 작가인 (김)범준의 새로운 풍경 그림을 건다. 그녀의 미적 취향은 자신만의 것이었을까?

(김)범준의 전작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예술하기>(단채널 영상, 00:03:50, 2011)를 통해서 보여준 영상과는 다르게 <완벽한 그림>에서는 포스트 프로덕션 기법인 대화글, 말풍선, 설명과 서사들이 화면 가득히 채운 영상으로 편집되어 제작되었다. 영상은 어머니의 미적 취향과 완벽한 그림에 대한 작가의 미학개념을 건드리는 것 같지만, 화면 가득히 채운 협찬에 대한 자막과 예술품에 대한 경제적 가치를 드러내는 글을 통해서, 예술의 상업성, 일상과 예술 간의 차이를 산업과 예술의 차이로 해석한 그의 재기발랄한 어법을 느끼게 한다. 

예술시장에 대한 비판, 예술이란 것의 미적 판단에 대한 현실은 작가가 추구하는 미적 판단과는 무관할 수 있다. 즉, 작가가 소속된 가족의 테두리 속에서도 소통되는 예술취향, 미적 판단은 완벽한 그림을 주문했던 그의 어머니의 선택과의 관계가 만들어낸 미학적 협상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김)범준 작가는 지금까지의 예술의 행위와 실천 속에서 그가 추구한 창작적 방향을 보자면, 예술맥락을 생성하고, 관계와 개념을 통해 자기미학을 생성한다. 그렇기에 그의 어머니가 선택한 어느 누구나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아무 장소’라 여길 수 있는 고즈넉한 산풍경은 “완벽한 그림”에 대한 비평과 질문을 던지며, 대중 관객의 미적 판단에 대한 작가(자신)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이중적으로 비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어느 누구의 미학적 정점을 꿰뚫지 못하는 ‘모두를 위한 예술’과 ‘모두의 예술’에 대한 비평, 그리고 예술의 상업성에 대한 비유들을 통해서 작가, 예술가들의 독선적인 예술관에 대한 반성을 주장하고, 일상과 예술의 흥미로운 교차점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