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효실

내기 혹은 유혹으로서의 예술, 그리고 장남-예술가의 효도-예술

양효실 (평론)
 
 사이in-between에서 모색하는 작가는 형식에서건 내용에서건 우선 둘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그리고 그 둘은 대등하지 않기에, 늘 하나는 다른 하나에 비해 열등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서 존재하기에, 사회적 위계나 가치를 전복하는 데 작업의 의미를 두어온 동시대 작가라면 당연히 그 열등하고 무의미한 것의 편에 서서 우월하거나 의미 있는 것을 탈-가치화하는 전략을 구사하기 마련이다. 예술과 공예,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예술과 일상, 회화와 사진처럼 상식과 편견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가시화하면서 무너뜨리려는 작가는 그러나 예술가이기에,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자신의 작업의 대상인바 예술의 ‘의미’를 타자의 존재를 통해 재고하려는 것이기에, 둘 ‘사이’에서 결국 예술을 확장하거나 예술을 해체하면서도 결국 예술의 지위를 보증하는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을 예술이게 만드는 타자와 예술을 동시에 제시하는, 즉 예술의 ‘바깥’을 통해 예술의 내부를 재고하려는 개념미술의 전략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모던한 예술가는 미적 질에 대한 실험이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발언을 통해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갖기에, 자신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상황을 반영하거나 재현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는 현재 젊은 작가들은 이미 SNS를 통해 자신의 ‘부족민’들과 소통하고, 예술가로서의 정체성보다는 문화생산자나 문화기획자로서의 정체성에 더 익숙한 듯 보인다. 사회와 절연하고, 자본을 멀리하는 예외적 인간으로서의 예술가-이상은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할 때나 동원되는 것 같고, 이미 항상 자본과 사회 안에서 시작하는 작가들에게 문제는 온전히 효용성과 기능으로만 환원되지는 않는 작업, 따라서 일견 상당히 어려운 작업을 해낼 수 있는 가에 있게 된다. 그러나 사회적 예술과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모더니즘을 정의했던 두 경향은 젊은 작가들에게는 기성 작가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나 알리바이이기에, 그렇다면 기성 세대의 예술과의 단절을 꾀하는, 새로운 예술을 제시하려는 젊은 작가가 꺼내드는 ‘패’는 가까운 곳, 자기 주변, 자기로부터 나오는 게 당연하다. 초연한 예술가는 당사자 예술가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고,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소재이자 주제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즉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관심보다는 자기만족적인 관심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이 고립된, 사소한, 구체적인, 1인칭의 작업들의 편재는 ‘새로운’ 경향, 스타일로 보이기도 한다. 진지한 시대에 예술가는 예언자나 구도자의 태도를 취했지만 지금 어떤 진지함도 그 자체로 의심스럽게 보이는 시대에 젊은 작가는 그런 역사적, 종교적 임무를 맡지 않을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작가이면서 멀리 보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 작업의 에너지는 내가 계속할 수 있는 것, 내가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올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예술, 새로운 감각이다. 허무주의와 우울과 유머와 자기희화화와 말초적 감각과 기성의 것에 대한 전복이 함께 움직이는 그런......

  젊은 작가 (김)범준은 지금 이곳의 불확실함, 그리고 자기자신의 작가로서의 모호한 정체성을 일종의 기회로, 자유로, 거의 모든 실험을 정당화하는 토대로 사용하는 작가이다. 그의 메모장에는 하고 싶은 작업들, 다루고 싶은 개념들, 비틀고 싶은 아이디어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고 하고, 그걸 증명하는 듯 온갖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나 기획전, 단체전에 다양한 작업을 갖고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중이다. (김)범준은 명백히 읽히는, 직설적인 작업보다는 시각적 이미지나 영상과 그것을 안정화하는 맥락의 부재 사이에서 낯설고 불안한 따라서 역동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단선적인 읽기에 저항하는, 마치 꿈-이미지처럼 읽히지 않는 파편적 이미지들의 중첩과 응축에 근거해서 구조화된 (김)범준의 영상, 퍼포먼스, 설치 작업을 보다보면 늘 이상하지만 어떤 ‘해방감’이 도래한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뭔지를 알지는 못하지만 느끼고 있기 때문이고, 애써 말하려 해도 말하지 못하는 것의 존재를 인정할 때 엄습하는 안도감 같은 것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관객에게 거는 내기, 보여진 것을 해독할 임무와 동시에 생각하지 말고 느낄 자유가 있는 관객에게 건네는 비틀기, 암시적인 상황이 일으키는 모호함을 해명할 ‘책임’은 (김)범준에게 있을 것이지만, 그는 그 책임을 부단히 새로운 다음 작업을 통해 해소하는 듯 보이기에 결국 우리는 작가에게 붙들린, 단서 외엔 어떤 장치도 없는 무력한 탐정처럼 또 보고 봐야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우리를 매혹당한 자로 만드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기도 하기에.

  (김)범준은 2011년 개인전에서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예술하기”란 제목으로 부모님 댁 거실에 가족을 모아놓고 “현대미술특강”을 진행하고, 2017년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역시 부모님 댁 거실에 작은 이불 하나를 펼쳐놓고 그 위에서 아버지와 씨름을 하거나 ‘아빠 자동차’에 올라타는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찍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역시 부모님 댁 거실 벽에 25년간 붙어 있던 섬진강 작가란 이름을 획득한 송만규의 너무나 키치적 작품―초가집 부엌문을 열고 나온 어린 딸아이가 아버지를 맞이하는 내용의―을 아들-화가의 작품으로 교체하길 원하는 엄마의 소원을 들어준 “완벽한 그림” 영상을 만들었다. “아들이 작가인데 그림 한 점 없었다”고 안타까워하는 엄마가 원한 그림은 미디어 아트를 전공한 작가, 회화의 보수성과 새로운 영상 매체의 급진성을 숙지한 작가에게는 그 자체 키치인 예술, 일상의 도구적인 기능과 목적성에 함몰된 예술을 만들어달라는, 즉 자신의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희생하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부모가 사랑하는 착한 아들이고 그런 사실에 별 불만이 없는 작가이기에 (김)범준은 착한 아들이 등장해서 어머니의 마음에 들 완벽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따듯한 서사를 만들고 그 안에서 그 아들 역할을 수행한다. 마침내 ‘완성한’ 그림, 어머니의 고향에 내려가서 사생한 그림을 거실에 거는 ‘감동적인’ 행위를 영상에 담았다. 왜 완벽한 그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완벽한 그림’은 그러나 관객에게는 제대로 보여지지 않았기에, 오직 그려지고 걸리고 엄마의 기쁨을 얻어냈다는 이야기와 시각적 흔적―흐릿하게 보여진다―으로서만 존재하기에, 지시체가 없는, 수행적 행위에 가까운, 언표행위(enunciation)와 비슷한 것으로서 제시된다.  
  또 14분 가량의 영상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유투브 크리에이터의 동영상 구조를 차용한 것이기에, 누군가에게는 포스트모던 패러디의 사례로, 누군가에게는 돈과 재미, 감동을 폭식하는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적 참조로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미술관에서 아들-예술가의 작품에 등장한 부모에 동일시할 일반인들, 키치와 예술의 경계를 드러내고자 자신의 일상을 (재)방문한 작가에 동일시할 관계자들, 흥미로운 대중매체의 편재와 권력을 모호하게 인용하는 작가를 비스듬히(의심스러운 눈으로? 너무 기발한 아이디어에 매몰된 듯 보여서?) 바라볼 전문가들이 전시장에 혼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어디든 존재하는 미술관, 지역민과 관광객과 사회와 아주 가까이에 세워진 근래의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단일하지 않기에 이미 항상 복수이기에 그렇다. 더욱이 모던 아트 이후 비평은 설자리를 잃었고, 당신이 느끼는 것이 곧 ‘그’ 느낌이다라고 말하는 시대에 미술관은 놀이터, 가게, 모임장소와 다르지 않은 곳이 되었다. 예술의 신화는 자본을 위한 알리바이이기도 하고.   
  작가 (김)범준은 감동과 냉소, 따듯함과 계산, 몰입과 초연, 유머와 아이러니가 동시에 공존하는 작업을 구사한다. 그는 진지한 예술을 비판하는가? 더 이상 그런 예술이 불가능한 상황을 미술관으로 갖고 오는 것인가? 상업과 자본과 키치와 따듯함과 가벼움―(김)범준이 우리 앞에 갖다 놓은 예술의 현실?―을 뺀 예술을, 그렇다면 동시대 예술은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것인가? 우연히 시작된 이 예술의 ‘거실화’, 예술을 집안으로 갖고 오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김)범준은 부모님과의 소통 및 예술에 대한 이해를 덤으로 얻었다고 말했다. 아들-예술가의 돈 안 되는 작업을 적극 응원해주는 부모님을 둔다는 것은 행운이다. 나이든 부모에게 멀리 있는 신성한 예술을 건넨 아들-예술가는 희귀하다. 예술이 시시해지면, 예술가는 큰 부담이나 위험을 겪지 않으면서 계속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범준은 어떤 아이디어를 어디서 실험하고 실현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부류의 젊은 작가이다. 영상 <완벽한 그림>은 기성 화가의 그림을 대신할 아들의 그림을 욕망하는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면서도 관습적인 회화를 패러디하면서 다시-쓴/차용한 작가 (김)범준의 실험을 모두 반영한 작업이다. 그 옆에는 엄마의 고향인 부안군 모산리란 이름에서 부분적으로 갖고 온  ‘모산(茅山)’, 실재하는 산이 아닌 산, 지시체가 없는 기호를 ‘대상’으로 그린 대형 걸개그림<모산>이 걸렸다. 작가는 이 기의없는 기표, 환유적 기표를 어머니의 산인 모산(母山), 이름 없는 산인 모산(某山)과도 같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실재가 부재할 때 언어가 갖는 자유, 유희적 속성을 부각시켰다. 삼중의 의미를 갖는 <모산>이 가리키는 산, 가느다랗고 묽은 여러 겹의 레이어가 산의 환영적 삼차원성을 만들어내는 이 ‘가짜’ 그림은 회화 앞에서 그릴지 말지를, 가리킬지 말지를 고심하는 젊은 작가를 우회적으로 비스듬하게 드러낸다. 젊다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것이고 실험한다는 것이고 한결같게 발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젊은 작가의 우릴 속이고야 마는 트릭 같은, 즐거운 놀이 같은, 재미있는 게임 같은 작업이 향후 어떤 작업을 낳게 되는지, 어떤 작업과 연결되는지를 보고 난 후 할 말이 더 있을 것 같다. 혹은 할 말 같은 것은 포기하고 속속들이 열고 파헤치고 생각하면서 탐정 행세를 하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