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월식

두번째 개인전_ 핑계 없는 무덤(buried without excuse)

김월식 (작가. 무늬만 커뮤니티)

저스트 무덤 
 "내게 그런 핑계 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혼자 남는 법을 내게 가르쳐준다며 농담처럼 진담인 듯 건넨 그 한마디 안개꽃 한 다발 속에 숨겨둔 편지엔 안녕이란 두 글자만 깊게 새겨있어 이렇게 쉽게 니가 날 떠날 줄을 몰랐어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게 슬픈 사랑을 가르쳐준다며 넌 핑계를 대고 있어" (김건모의 '핑계'중에서) 
 지금은(도?) 예능에서야 가끔 그 능청스러움을 보여주면서 TV매체에서 멀어진 가수지만, 한 때는 시절을 평정하고 호령했던, 또 음악만큼은 감히 누구도 그의 앞에서 건방을 떨수 없는 '김건모'라는 가수의 '핑계'라는 노래가 있다. 1993년 발매하고 2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레게풍의 이 노래는 문화대통령 서태지가 만든 댄스음악 판에 레게음악을 차용하여 1994년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한다. 이 후 김건모는 다양한 히트곡을 만들었으며 '핑계'는 김건모의 명반, 명곡 대열에서 가끔 호명되어 이별한 자의 아픔을 대변한다. 연인을 차는데 붙여진 '핑계'는 차이는 자에게는 늘 '농담처럼 진담인 듯' 다가온다. '밀당'이라는 연애의 기술이 연애의 긍정적 시그널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몰래카메라가 방송에서 황당한 사건을 거짓으로 만들어가며 웃음을 조장하는 세상에서, 가짜 뉴스가 진짜 뉴스보다 더 확산성이 빠르고 대중의 판단을 흐리고 있는 세상에서,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면서 선정적인 기사의 제목들이 언론과 포털에서 누리꾼들을 낚시질하는 세상에서 이별처럼 지고지순한 감정 따위가 '농담처럼 진담인 듯' 다가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핑계'자체가 갖고 있었던 '의심 속에 존재했던 작은 믿음의 씨앗'을 기대하기란 이제 힘든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거짓이 극한값으로 수렴하는 수열이 되어 버린 '핑계'를 어처구니없게도 김범준은 작업의 알고리즘으로 사용한다. 속이 빤하게 보이는 얕은 수로는 타인을 설득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패를 보여주는 카드게임과 비슷한 '핑계'의 알고리즘은 자신을 기만하거나 무시하도록 판을 깔아준다. 그런데 어설픈 바보 연기로는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십상이다. 그래서 김범준의 '핑계'는 어설픔의 바보연기를 흐르게 만들면서 어쩌면 들뢰즈의 개념처럼 '되기'의 연속성과 수행적 관성을 만들고 있다. 미립자가 되어버린 '의심 속에 존재했던 작은 믿음의 씨앗'은 '되기'가 되어 흐르면서 예술적 자각과 교묘하게 섞인다. '핑계'에서 미학을 추출하는 이 프로세스는 기본적으로 타자들의 잠정적인 확신과 신념을 이용한다. 사기와 전복, 거짓과 능청, 배를 째라는 허세 속에서 작동되고 있는 '핑계의 미학'은 거창하게도 '가족의사랑', '애국심', '민족애', '전통'등의 거창한 무덤을 향하고 있다. 그러면서 핑계는 대지 않겠다고 사뭇 비장하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그냥 무덤일 뿐이라고.

썸씽 포 낫씽 
 김범준 에게는 매우 황송할 일이지만 나는 김범준의 개인전 '핑계 없는 무덤'에서 故 박이소 작가의 작업 「something for nothing」을 떠올린다. 긴 나무 테이블 위의 양쪽에 놓여 있는 붉은 플라스틱 양푼과 그 양푼위에 산처럼 솟아있는 시멘트 덩어리, 유추하건데 반대쪽 양푼은 산처럼 시멘트 덩어리를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 시멘트와 모래를 양생한 흔적이다. 예술작품으로 보기에 다소 민망한 조형미와 마감을 갖고 있는 이 작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을 '예술(작품)'의 극한 경지로 설명 하고 있다. '삶의 공허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기 치료적 탈주수단'으로써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을 제작했던 박이소 작가는 찬란한 예술적 가치를 이미 성찰한 작가 스스로를 기만하고 무시하는 '핑계'를 대고 있었는지 모른다. 시멘트와 모래를 섞고 물을 부어 점성을 만들고 그것을 주물럭거리면서, 또 플라스틱 양푼에 차곡차곡 소조처럼 붙여나가면서 허망하게 솟으며 굳어버린 시멘트 덩어리를 보면서 '농담처럼 진담인 듯' 삶과 예술의 헛헛한 인과관계를 들여다보면서 말이다. 적어도 몇 몇 작가에게 '핑계'는 그런 것이다. 삶과 예술을 영위하는 방식으로 작동 시키는 '핑계 – 아무것도 아닌 것' 없는 '무덤-어떤 것'인 것이다.

핑계의 외연 
 김범준은 몇 해 전 한 전시에서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예술 하기'라는 작업을 선보였다.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아파트의 한 거실에 '현대미술 특강'이라는 현수막을 걸어 놓고, 부모님과 가족 친지들을 모두 모아 놓고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행사를 갖는다. 부모야 낳아놓은 책임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더라도, 동원된 친지들은 이 황당하고 민망한 진지함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해보면 실소를 금할 수 가 없다. 전라북도 전주는 대체로 양반의 도시이다. 대체로 문인화와 산수화, 혹은 대상과 잘 닮은 인물화나 자연을 담은 풍경화 등을 미술작품의 대부분으로 이해하는 전주의 가족, 친지들은 '누드'가 등장하는 유화 작품만 봐도 얼굴을 붉힐 상황인데, 이 듣보잡의 말도 안 되는 현대미술의 황당함을 보면서 참아 눌렀던 '점잔'은 대한민국에서 컨템포러리 아티스트를 가족 친지로 가진 모든 이들의 공통된 숙명일 수도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황담함의 끝에 박수를 보내고 격려를 보내는 가족 친지의 너그러운 '점잔'은 집 담벼락을 넘어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도 종종 목도하게 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현대미술 앞에서 '점잔'을 떠는 가족과 친지, 우리가 흔하게 미술관에서 만나게 되는 관람객의 우아한 표정을 욕하거나 폄하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장남이라는 무게에 걸맞는 '핑계'를 자신의 작업에 고스란히 갖다 쓰는 '뻔뻔한' 김범준을 욕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가족과 친지도 설득시키기 힘든 작업을 하고 있는 김범준에게서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타자의 배려인 '점잔'과 '우아함'에 기스를 내면서 까지 자신의 작업에 '핑계'를 대고 있는 김범준의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예술하기'는 '핑계'를 대면서 '핑계'를 지우는 '예술 – 되기'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대체로 김범준의 작업적 알레고리인 '핑계'를 대고 지우는 과정을 늘려서 들여다보면 납득할 수 없는,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욕을 부르는, 안쓰러운 실천의 부조리함이 존재한다. 그래서 김범준은 작업을 할 때마다 시시각각 새로운 롤로 변신하는데 장남으로, 군인으로, 경찰로, 혹은 도둑으로 변신하면서 장남, 군인, 경찰, 도둑에게 기대하는 심정들을 배반한다. 어찌 보면 미친 짓에 가까운 이 행위들은 삶의 영역에서 일상적인 풍경 속에 존재하지만, 일상의 합리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부조리를 가득 포함함으로써 롤(role)에서 미끄러지게 한다. 기대를 저버리는 태도를 자행하는데 전혀 망설임이 없는 이 미끄럼이야 말로 '핑계의 미학'이다. 손에 기름을 가득 묻혀서 멀쩡한 길에 차근차근 정성스레 기름을 바르고 그 길을 걸으면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미끄러지는 '핑계'를 기름에 두고 왜 그 기름을 길에 정성스레 바르게 되었는지를 잊게 하는 방법, '핑계' 밖의 '핑계', '어떤 것'밖의 '아무것도 아닌 것'에 김범준의 작업이 존재한다. 이 즈음이면 '핑계'의 외연을 확장한 공로를 삼아 김범준의 '핑계'를 인정한다. 

 김범준은 이번 개인전 『핑계 없는 무덤』에서 다시 아버지를 소환하여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도슨트의 역할을 주문한다. 도슨트 역할을 마다 않은 김범준의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 어떤 희생이라고 감수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아버지의 초상이다. 장남이라는 '핑계'가 만들어 놓은 '무덤'을 이유 없는 무연고자의 '무덤'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현대미술의 지적 논리와 상상력의 인과관계를 프로페셔널하게 설명할 아버지의 숙련되고 자신감 넘치는, 세련된 전시 해설이 필요하다. 조각가가 섬세하고도 집요하게 돌과 철, 나무를 깍듯이 화가가 한획한획 긴장된 스트로크로 붓질을 해 나가듯이, 자식의 작업과 그 개념을 숙지하고 또 숙지하여, 다양한 현대미술의 언어로 번역한 후, 자신의 언어처럼 구사할 수 있도록 지시하고 연출하는 과정에 김범준의 예술혼이 담길 것이다.

핑계의 근육 
 김범준은 이번 전시를 위해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 앞에 있는 성화를 훔친다.이 성화는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된 성화를 올림픽 공원에 옮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는 이 훔친 성화로 초에 오랜 시간 보관 하면서 흘린 촛농을 모아 비둘기 상을 제작한다. 전시장에서는 즉석에서 이 성화로 만든 달고나를 관람객들에게 만들어 나누어 주는 퍼포먼스가 진행될 예정이며, 관람객들은 달고나(뽑기)에 찍혀 있는 성화 모양을 뽑기 위해 손으로, 혹은 바늘로 성화의 라인을 조심스레 달래가며 부서져 나가는 달고나의 단맛을 음미하게 될 것이다. 훔친 불을 보관하기 위해 만드는 평화의 상징과 훔친 불로 공유하고 싶은 부서지기 쉬운 달고나의 단맛들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도슨트의 족보를 알아야만 그 때서야 이해 가능한 함정이 존재한다. '핑계'를 지우기 위한 이 경로는 가끔, 보는 사람에게 힌트가 되어 주기도 하고 길을 잃게도 만든다. 전시장 바닥에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여기저기를 굴러다닌 검정색 비닐봉지가 여전히 굴러다닐 수 있다. 이 비닐봉지는 동네의 흔한 구멍가게에서, 재래시장 야채 가게의 한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봉지로 무궁화가 피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어디든 굴러다닌다. 사람의 발에 치이기도 하고,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뜯기기도 하고, 바람을 따라 정처 없이 날라 다니기도 한다. 흔하게 자주 사소하게 관찰되는 이 검정색 비닐봉지가 굴러다니지 않는 공간은 대게 검정 비닐봉지로 상징되는 사소함과 가벼움, 천박함이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김범준의 이 검정색 비닐봉지는 미술관과 갤러리, 발전소와 이제 곧 문화 공간으로 재생될 공장의 공간에서 굴렀다. 제도 안에서 제도 비평이 가능한 공간에서 계속 바닥을 구르며 성장하는 비닐봉지는 김범준이 기르고 있는 애완 고양이처럼 생태적으로 길러진다. 비닐을 운동시키며 비닐의 근육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김범준은 '핑계'의 근육을 늘리고 있다.

핑계 없는/있는 무덤 
 김범준의 예전 작업 중 군부대 연병장 앞 내무반 앞에 우람하게 서있는 소나무의 사진 작업이 있다. '매일 아침 애국가를 들으며 자라는 군부대의 소나무'로 붙여진 이 작업은 흔한 소나무 한그루를 엄청난 애국의 심볼로 전환 시킨다. 정조가 안양을 걸으며 산위에 서있는 소나무에게 하사했던 정2품의 품계와 맞장을 떠도 무방할 만큼의 애국적 기개를 소나무에 씌어 줌으로써 김범준은 마치 정조의 위계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 1년 6개월 동안 군생활을 하면서 매일 애국가를 부른 군인은 전역하고 나서는 다음날로 애국가를 부르거나 듣는 일을 대부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나무는 그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한 부대원이 이등병에서 전역을 이루는 동안의 세월의 몇 갑절, 몇 십 갑절을 우직하게 비가 오나 눈이오나 애국가를 들었으니 그 애국충정의 정도를 범인이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불충과 매국의 조건으로 만든 셈이다. 늘 푸른 소나무와 강직한 애국을 연결시켜 만든 신화는 죽어서도 세상에 회자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이 신화를 만드는 구라가 김범준의 '핑계 없는 무덤'이다. 빈 땅에 봉분을 세우고 떼를 입혀서 무덤을 만드는 자는 산 사람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왜 죽었는지를 알 길이 없다. 대신 살아 있는 사람이 저 무덤의 정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한다. 그래서 무덤은 영웅의 것이 되거나 악인의 것이 되고, 아주 평범하게 생을 마감한 대부분의 사람의 것이 된다. 핑계는 그래서 무섭다. 신화와 구라사이에 존재하면서 농담처럼 진담인 듯 만들어진 언어의 존재가 예술(가)의 작업과 다르지 않다. 김범준은 이 전시에서 아마도 신화와 구라를 넘나드는 작가적 삶과 작업의 방식을 노골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듯 보인다. 평범하게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의 무덤 앞에서 개별적 삶의 가치 있던 '핑계'를 만들어 주는 역할로 김범준의 작업은 존재 한다. 나는 그가 어떤 무덤 앞을 서성거릴지, 김범준이 어떤 핑계를 만들거나 지울지 또 가끔 궁금해 할 것이다.